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조지 월리스]]의 총격과 맥거번의 후보자 지명 ==== 그러나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 월리스가 아서 브레머에게 총격당한 것이다. 경선이 하루 남은 날에 일어난 암살미수는 경선을 뒤흔들어놓는 데 성공했다. 매릴랜드에서 월리스는 편안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미시간의 결과였다. 미시간 주에서는 얼마 전에 내려진 버싱 판결로 인하여 인종적 분노가 고조된 상태였다. 거기에다 월리스의 총격으로 인한 동정표까지 더해져 표 과반수를 얻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월리스는 소수파였고 승리할 수는 없었다. 이제 프론트러너 험프리와 맥거번이 시선을 돌린 곳은 캘리포니아였다. 험프리는 캘리포니아를 이기지 못하면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압도적인 프론트러너가 돤 맥거번은 험프리보다 돈을 4배나 부어대며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험프리 대 맥거번 토론회에서 맥거번이 자신의 1000달러 기본소득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역전의 기회가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프라이머리 날이 다가왔다. 다 끝났다. 맥거번은 5% 차로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 271명의 대의원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앞으로 남은 경선도 싹쓸이하며 압도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경선 결과, 총 득표수에서는 험프리가 불과 '''0.5%p'''차이로 맥거번을 제쳤으나, 대의원 수에서는 맥거번이 크게 앞섰다. 앞서 언급한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에 의해 통과된 슈퍼 대의원 제도에서 맥거번이 큰 수혜를 입은 까닭이었다. 험프리는 노동조합의 표심을 앞세운 "전격전"에는 성공했으나, 정작 여성이나 대학생, 청년 등 지역 풀뿌리 조직의 지지를 얻어내는 "진지전"에는 실패했고, 이것이 험프리의 실패를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반면 조지 맥거번은 소액 후원자들의 막강한 지지를 바탕으로 대의원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자금 상황은 험프리가 가장 좋았고 그 다음이 월리스, 머스키였으며 조지 맥거번은 자금이 딸렸지만 그것을 대학생들의 자원봉사와 소액 기부로 매꿨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맥거번이글턴1972.jpg|width=100%]]}}} || ||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맥거번과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이글턴'''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